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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무신정권, 팔만대장경, 신돈, 계유정난, 임진왜란 ('20.09.24)

정상에서만납시다 2020. 9. 24. 21:30

고인돌 문화는 한반도, 만주 등지 널리 분포, 특히 요동 지역에서 많이 발견

신라 박혁거세의 신화는 천손강림형 + 난생신화 요소 

삼국 시대에 사람들이 주로 경작한 농산물은 콩이나 조 등의 잡곡류였다. 하지만 4세기 초반부터 신라에서는 수전 농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세기에 들어와서는 벼의 생산량이 증가해 주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다.

4~5세기경에는 철제로 만든 따비나 괭이, , 쇠스랑 등의 농기구가 보급되어 땅을 깊게 갈 수 있게 되었다. 저수지를 축조해 농사에 필요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 했고, 소를 이용한 우경 농법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신라 선덕여왕 황룡사 9층탑

권력을 장악한 정중부 일파는 의종을 폐위해 거제도로 쫓아내고, 그 아우인 명종을 제19대 왕으로 옹립했다. 명종 즉위와 더불어 행해진 농공행상을 통해 그동안 문신들이 차지해 왔던 요직들은 고스란히 무신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게 무인 시대가 개막했다.

고려 희종 때, 몽골 초원에서는 칭기즈칸이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몽골의 강력한 위세는 만주 벌판을 건너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종 3(1216), 몽골군에게 쫓긴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고려의 강화도 천도 소식을 접한 몽골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고려를 다시 공격했지만 수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몽골군에게 바다 건너의 섬을 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내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고려의 백성들을 함부로 강탈하고 도륙했다. 

그런 동안,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에 은거한 왕과 귀족들은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호사를 누렸다. 이때 최우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외적을 물리치고자 고종 23(1236)부터 대장경 조파을 시작했다. 그 후 15년 만인 고종 38(1251) 8 1,258판에 달하는, 이른바 <<팔만대장경>>이 완성 되었다.

고종 22(1235)부터 개시된 몽골의 3차 침입은 고종 26(1239)까지 진행되었다 이때 경주의 황룡사 9층탑이 소실되는가 하면, 강화도에서는 대장경 조판이 이루어졌다. 

신돈은 공민왕 18(1369) 지방의 실력자에게 해당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은 5도 도사심관이 되어 세력을 키우려 했다. 하지만 사심관 제도의 부활도 공민왕의 반대로 좌절되자, 신돈은 왕의 신임이 사라졌음을 깨닫고는 역심을 품게 되었다. 공민왕 20(1371) 7월에 왕이 헌릉과 경릉에 거둥할 때를 거사일로 잡은 신돈은 은밀하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던 중 역모 사실이 드러나 붙잡힌 그는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수하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1392 7월 무너진 고려의 사직 위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전 왕조의 주인인 왕씨들을 따로따로 귀양 보냈다가 한 배에 태워 바라에서 수장시키는 잔혹함을 보였다.

천도하고 5년이 지난 1399년에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은 왕자의 난으로 형제간에 골육상쟁의 피를 뿌린 한양에서 구도인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개경에서도 또다시 왕자의 난이 발발하자, 동생인 방원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이로써 조선의 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정도전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각종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천도를 위한 한양 건설 기획과 공사에서 총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조선 건국에 공헌한 또 다른 인사인 이방원은 여러 측면에서 정도전과 갈등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은 상왕인 태종이 거머쥐고 있었다. 전제적인 철권통치를 밀어붙인 태종과 달리, 세종은 문치주의에 입각한 안정적인 유교적 통치를 펼쳐나갔다. 

계유정난 – 단종 원년(1453) -> 수양 대군은 최대 정적이었던 김종서를 제거 – 영화 <<관상>>

모든 권한을 숙부에게 빼앗긴 단종은 재위 3년인 1455년 윤6 11일에 숙부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 앉았다. 

임진왜란 전의 정세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포르투갈 상인에게 화약총 기술을 전수받은 오다 노부나가가 조총 부대를 결성해 경쟁자들을 빠른 속도로 제압해 나갔다.

1582년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 당하고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통일이 완수 됨. 

조선의 문치주의는 오랜 평화 속에서 국방력의 약화를 초래,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 -> 의주로 옮겨감. 

1592년 시작된 임진 왜란이 동아시아 삼국에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

일본: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권을 거머쥐었다.

중국: 명나라 쇠퇴하고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의 패자로 부상.

숙종 -> (경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 

정조는 화성 축조를 통해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물적 토대를 완성하고자 했다.

흥선대원군이 집념으로 이룬 경복궁 중건은 크기가 7천여 칸으로, 300여 칸이었던 본래 경복궁보다 20배 이상이나 넓었다. 이는 그의 개혁 정책의 목적이 민생 안정이 아닌 왕권 강화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참고도서] 궁금해서 밤새 읽는 한국사 (20.08.06) - <이근호>